February, 2007


24
Feb 07

삶을 사는 방법, 철들기

지금은 블로그 Draft 를 정리하고 있는데.. 아래 글은 ..한 1년 전에 쓴 글이다.. 2006년 2월 말이니.. 1년 전이구나.. 요즘에는.. 내가 선택해서가 아니고.. 외부의 힘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할 수 없이 철이 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좋은 의미의 철드는 것이 아니고.. 그냥 세상에 찌든다는 의미에 철 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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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쿠버를 뜨기전, 쿨짹님과 저녁을 먹었었다. 바로 가기로한 M양과의 수영약속때문에 오래 이야기 나누지 못했고, 또 감기가 다 낫지는 않으셨기에 오래 붙잡기도 그랬다. 만나서 도움이 되는 이야기도 듣고.. 했다. 그리고 만나고 나서 생각이 많이 들었다. 원래 어떤 분인지는 블로그를 읽기에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만나보니 더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성격이) 나랑 정말 비슷한 사람이구나’

삶에대해 생각 하는법, 사람을 만나는법, 자신의 캐리어를 지켜나가는법. 다른 환경에서 자라났기에 결과는 다르게 나타났지만, 살아가는 방식 그리고 생각하는 방식이 참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공부를 그저 그렇게 한다는 점이랑.. 나는 운동을 싫어한다는 점은 좀 다르지만 ㅋ
오늘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철이 든다는 것은, 많은 것들을 포기하는 일이다.
철이 든다는 것은, 삶의 아름다움중에서 하나를 더 놓아버리는 일이다.
하지만 철이 든다는 것은, 삶을 쉽게 살아가는 방법이다.
철이 든다는 것은, 생각보다 참으로 쉬운 일이다.
철이 든다는 것은, 철이든 사람에게는 참으로 슬픈 일이다.
철이 안든 사람은 철이 들 수 있지만, 철이 든 사람은 다시 철이 안들 수 없다. 아마도 철든것의 편안함에 익숙해 져버려서, 자신이 놓아버린 삶의 아름다움을 다시 찾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것일게다.


24
Feb 07

교육재정 6% 확보해주세요

퀴즈..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공약공통점중에 이루어지지 않은 공통적인 것이 있다.. 무엇인가?
김영삼 대통령도, 김대중 대통령도, 노무현 대통령도 교육재정 6%를 공약했다.

검색엔진에서 “교육재정 6%”로 검색하면 나오는 자료들… 하지만 지켜지지 않는 공약(空約).. 우리학교 공대 등록금은 400만원을 돌파했고.. 수많은 학생들이 그저.. 선택의 여지 없이 학자금 대출로 발길을 옮기고 있다. 학자금 대출로 인해 빚을 지고 졸업하는 학생은 약 40%인가.. 라는 통계를 본적이 있고 나도 일부 예외가 아니다.

이제는 대안을 찾고.. 고민하고 투쟁하기 보다는. 그저 무기력감을 느낄 뿐이다. 물가상승률의 2개의 속도로 상승하는 등록금..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이제 뭉치지 않는다. 올라가면.. 불평만을 쏟아내고 끝날 수 밖에. 이 속도로가면 3년 후에는 등록금 500만원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미친것 아닐까.


24
Feb 07

게으를 수 있는 권리

같이 자리를 하고 파한후에 친구와의 문자

친구: 취한다.
나 : 숙제하기 싫어 난 왜이리 게으를까
친구: 인간은 게으름의 권리가 있었는데..ㅋㅋ
나 : 정말 언제?
친구: 날씨가 좋아야 일할 수 있었을때.. 발전이 좋은 것 만은 아냐

우리학교에는 일년에 한번인가? 나오는 교지가 있다. 거기에 기가막힌 만화.. 가 있었다. 정말 나를 생각하게 하는.. 만화

나는 “busy” guy 이다. 바쁘다.. 언제나. 일을 하고 뭐도 하고 뭐고하고.. 일을 벌리고 사람을 만난다. 게으름의 미학, 느림의 필요성.. 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완전히 게으른.. 집에 처박힌 생활을 한 일주일 정도 했으면 좋겠다.

천천히.. TV도보고.. 소설도 읽고.. 밥은 대충 먹고 배고프면 라면 먹고.. ㅋ


12
Feb 07

사진을 찍기, 찍히기 그리고 총 쏘기

바야흐로 사진의 범람시대다. 내가 어릴적만해도 필름값도 아깝고 인화비도 아까워서 특별한 날에나 찍던 사진이.. 이제는 필름값 걱정없는 디카의 시대를 넘어 DSLR의 보급화와 또 폰카.. 로 인해 카메라는 말그대로 ‘어디에나’ 있다.

이번에 네팔 봉사단이 2주동안 활동하면서 20명의 대학생이 찍은 사진은.. 약 1만2천장에 다른다. 20명이 사진을 모아서 DVD에 구웠더니 2장에 빠듯 들어가더란다. 9기가를 넘어서는 대단한 양이다. 3년 전만해도.. 이런 일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우리 네팔봉사팀은.. 봉사중간에도 ‘남는건 사진’이라고 자신들에게 일깨우면서 부지런히도 셔텨를 눌러댔다. 똑딱이, DSLR, 필카 모두 동원 되었다.

이제 사진을 찍고 찍히는 건 너무 면역이 되었다고 느끼는 즈음.. 한겨레 21을 읽다가 만난 한 취재 이야기는 마음에 와 닿는다.

사진을 찍는 행위에는 항상 공격성이 내재해 있다고 수전 손택이 < 타인의 고통>에서 쓴 적이 있다. “카메라와 총, 그러니까 피사체를 쏘는 카메라와 인간이 쏘는 총은 동일시 될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취재 행위도 본질적으로 타자에 대한 식민성이 내재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처음 기자를 만나는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의미 체계가 기자를 통해 오롯이 기사에 옮겨질 것으로 기대한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다. 기자의 머리에는 기자가 쓰고자하는 ‘주제’의 비수가 숨겨져 있으며, 때로 그 비수는 취재원을 찌르기도 한다. 그리고 기사에는 기자가 해석한 세계만 펼쳐질 뿐이다.

그렇다. 우리는 수없이 셔텨를 누르면서 그들을 ‘타겟’으로, ‘대상’으로 생각하게 된다. 물론 그 네팔의 순진한 아이들, 같이 시간을 보낸 사람들을 찍을때, 기자들이 아프리카에서 굶은 아이들을 향해 무작정 셔터를 누르듯이 사진을 찍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내재되어있는 ‘사진을 찍는다’는 행동은 그들을 대상으로 삼는.. 그런 심리가 내포되어있다. 그래서 사진을 같이 찍을때는 같이 찍어도 되냐고 정중히 물어야 하는 것이다.

위의 글은, 기자의 입장에서 쓴 글이라서 우리의 경우에는 조금은 안 맞을 수도 있다. 실제 아이들은 ‘one picture~ one picture~’ 하면서 사진을 찍히고 싶어하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들은 사진을 찍히는 것에대한 의미를 잘 알지 못한다. 나도 대부분의 경우에 그들과 함께, 또는 동의를 구하고 사진을 찍었지만, 때로는 나도 그들을 피사체로서 보고서 사진을 찍은 일도 많았다. 네팔에서, 역시 봉사단의 멤버였던 J양은 그런 이유로 아무때나 사진 찍는것을 싫어하는 듯 보였다.

또한 우리가 찍는 사진은 위 발췌 글의 ‘기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아이들은 사진을 찍으면 우리가 사진을 인화해서 준다고 생각했을까? 그래서 사진을 찍고 싶어하는 것일까? 왜 사진을 찍고 싶어하는 것일까? 하는 부분은 우리 네팔 봉사팀에서도 잠시 지나가는 의문점이기도 하였다. 사진이 흔치않은 네팔에서, 그들은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찍히는 것에대한 의미도 모르고 있다. 물론 우리가 그 사진을 악용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네팔에서, 그들이 사진을 찍히며 자신이 피사체로 느껴진 일이 없었기를, 상처받은 일이 없었기를 바란다. 또 나에게 ‘Amar(나의 네팔이름 – 기억속에서 죽지 않는자 – 잊혀지지 않는자 – 라는 뜻) don’t forget me~!’ 라고 말해주던 네팔의 소녀들이 기억나면서 그들이 찍힌 사진이 그들을 기억하는 좋은 의도로만 사용되기를 바래본다.


11
Feb 07

네팔 보고서

학교에 내야 했던 보고서.. 짧은 시간내에 쓴 것이고.. 공식 보고서이기 때문에 약간의 가식이 들어있다. 거짓말은 없다.

내가 네팔에 지원하게 된 것은 지난 여름 중국에서의 좋은 기억들과 인도 여행에 대한 동경이 복합되어 중국과 인도 사이에 있는 나라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한다. BRIC이 세계 시장의 주도권을 이끌어 나아가기 시작한다는 이야기가 종종 들리고는 한다. BRIC 은 Brazil, Russia, India, and China 의 약자로서 BRIC의 중심을 이루는 나라 중에 인도, 중국이 있고 네팔은 그 사이에 있는 나라로서 그 나라들을 같이 이해하는 시발점을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불교가 시작된 나라, 힌두교의 발상지, 아름다운 히말라야를 간직한 나라 라는 점도 커다란 매력이 아닐 수 없다. 나에게 힌두교라는 종교는 낮설음과 또 그에 따른 호기심을 유발하는 종교이고 네팔인의 대부분이 힌두교라는 점도 또 하나의 네팔이라는 나라의 매력이라고 하고 싶다.

지나가는 말로 듣기에 네팔은 세계에서 5등정도의 후진국이라고 들었다. 기준도 모르겠고 출처도 모르는 정보이기는 하지만, 그 정보는 내가 네팔에 내가 도착하고 처음 느끼게 된 느낌과 많은 부분 일치한다. 아직 많은 나라를 여행한 것은 아니지만, 네팔의 수도 카트만투에서 느낀 것은 아직은 정돈되지 못한 혼란스러움 이었다. 공항에서 호텔로 이동하면서 겉으로는 알 수 없는 네팔의 아름다움과 내면적인 내용들을 많이 느끼리라 생각하였다.

다음날 우리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게 될 푸퉁의 학교를 처음 보았을 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창틀만 있고 창문이 없는 학교의 앙상한 몰골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전기시설도 미약하여 컴퓨터등을 설치할 수 없었다. 우리는 컴퓨터를 2대를 가지고 갔는데 창문이 없었기에 비가 들이칠까봐 학교안에 컴퓨터를 들여놓을 수 없었다. 일단은 컴퓨터를 특정 장소에 들여놓았는데 나중에라도 학교에 제대로 설치되기를 바랄 뿐이다. 학교 운동장에는 또한 몇몇개의 작은 사원이 있다. 시바, 비슈노, 가르네스 등의 신의 신전이 있고 사람들은 새벽에 각 신전에서 기도를 한다. 네팔사람들의 종교가 생활과 얼마나 밀접한지를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내가 네팔에서 가장 행복했던 경험은, 너비나, 쌍기타 그리고 어니따와 지금은 이름을 잊어버린.. 아이들과 함께 했던 산책이었다. 몇몇 우리 봉사단은 농구를 하러가고.. 나는 어떻게 하다가 아이들에게 끌려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들판을 헤메이고.. 농구장도 가고.. 너비나네 집에서 커피도 얻어마시고.. 한 일이 있었다. 봉사활동 기간의 막바지에 있었던 일이었다. 당시의 느낌을 글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지만, 순수한, 천진난만 하기만 한 아이들의 손에 이끌려서 들판을 거닐고 장난 투정을 받아주고 나도 장난으로 투정을 부리고.. 전혀 아무런 목적지도 방향도 없이 들판을 가로지르던 기억은 나의 네팔에서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다. 너비나네 집 – 전기도 가스도 없는 흙으로 지어진 집- 에서 아궁이불로 끓인 물로 끓여준 커피, 그리고 볶은 콩을 주는 너비나네 가족들은 너무도 친절하였고 말은 안 통하지만 많은 공감을 할 수 있었다.

우리가 많은 시간을 보냈던 푸퉁학교의 학생들은 6~16세의 학생들 뿐이었지만, 우리가 작업을 하는 중에는 동네의 많은 청년들이 또한 와 있기도 하였다. 또한 짧은 시간이지만 SM college(Purbanchal University의 부속 college)의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있었다. 실제로 짬짬이 동네 청년 (주로 20~23세)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몇몇은 영어의사소통에 능숙했기 때문에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주로 학제나.. 사회시스템, 종교에 대한 이야기들을 주고 받았다. 나는 그들의 미래는 어떻고 그들의 미래는 어떠한 가능성이 있는지, 어린 학생들도 아니고 어른들도 아닌 당장 네팔의 미래를 이끌어갈 그들의 생각은 어떤지 매우 관심이 있었다. 모든 네팔 청년들이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네팔의 정치와 사회시스템에 많은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무조건적인 불안감 보다는 의욕과 희망을 찾으려는 노력을 느낄 수 있었다. 한국의 대학생, 한국의 젊은이와는 실제 너무도 많은 다르기 때문에 너무 이질감을 느끼지 않는 정도의 수준으로 대화를 이끌어 나가곤 했는데, 개인적으로 그들이 더 확실한 미래를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내가 이번 봉사에서 느낀 점, 배운 점은 매우 많지만 아쉬움이 더 많이 남는다.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봉사 내내 열린 마음이지 못하였고, 계속 불편한 마음이었다. 나는 평소의 나 답지 못하고 계속 위축되어있었다. 개인적으로 이런 봉사활동이나 단체활동을 매우 즐기는데 이상한 일이다. 봉사단은 대부분의 사안에 있어서 자율적으로 매끄럽게 돌아갔지만 또한 많은 문제점도 내포하고 있던 것이 사실이다. 그 답답함의 원인, 그리고 나를 위축되게 만든 원인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이번 봉사는 나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쳐 줌과 동시에 더 많은 숙제를 남겨주었다고 생각된다. 아직은 그 속에서 느낀 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도 정리가 안되었다는 느낌이다. 이번 봉사가 나를 또 다른 봉사, 또 다른 여행으로 이끄는 계기가 될 것 같다.


11
Feb 07

네팔, 그 곳에서..

2주간 홍팔동자(홍익대학교 네팔 동계 자원봉사) 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학교에서 주관하는 자원 봉사 프로그램이다.

오랜만의 단체생활.. 나름 빡센 일정들 속에서 내가 한 것은 무엇이고 배운 것은 무엇일까? 내가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 햇던 것들은 아니었고.. 조금은 다른 것들을 찾을 수 있었던 듯 하다. 자세한 후기는 다이어리 보면서 적기로 하고 머리속에 떠오르는 걸 한번 적어보려한다.

농활 vs 네팔국제봉사

지금까지 내가 가장 많이 경험한 봉사활동은 농활이다 매년 빠지지 않고, 10일씩 한 6번 이상 참가를 했으니 말이다ㅋ 농활과 네팔 봉사는 정말 많이 다르다. 농활은 전수해 내려오는 시스템(농활대장, 생활대장 이니.. 여농반 아동반 이니.. 근로대장이니.. 하는 것들)과 형식, 경험이 있고.. 현지 답사가 있고 거의 아는 사람들끼리 가며, 숙련된 선배들이 이끈다. 하지만 국제봉사는 이미 정해져 있는 시스템 보다는 각기 전공도 다른, 모르는 사람들이 새로운 시스템, 조직과 형식을 만들고.. 자발성에 기초하여서 모든 것을 정해나아간다.

내 친구 su의 말에 의하면 그는 몽고로 갔던 국제봉사에서 자발성의 힘을 느꼈다고 한다. 농활에서의 강제성(강제성을 띄는 회의와 규제들)이 없이 아름답게 모든 것이 자발적으로 돌아가는 모습말이다. 내가 이번에 느낀것을 친구의 말에 비추어 보자면.. ‘잘 모르겠다’라고나 할까. 농활과는 확실히 다른 시스템이지만.. 그로인해 생길 수 있는 부작용을 나는 많이 보지 않았나 싶다.

농활에서의 정치성과 목적성(?) 보다, 네팔이라는 이국적인 환경에서의 국제봉사, 국제교류는 어찌보면 크지만 또한 간단하고 쉽기도한 일 일수도 있다. 농촌에서의 나름 복잡다단한 농민회 및 기타 농민분들 속에서 농활을 하는 것은 ‘개척’하는 느낌이 들곤 한다. 네팔에서의 봉사는.. 그것보다는 그냥 골치아프지 않은.. 쉬운 봉사가 아니었나 싶다.

이상했던 기억

네팔에서의 나는 조금 이상했다. 감을 잡지 못하고 헤메였다. 오늘 네팔 사진을 정리하면서 기억을 떠올리다보니.. 그랬던 내가 아쉬울 따름이다.